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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도이그 (Peter Doig) 물감을 캔버스에 담그다

작품 & 작가 분석

by sukimin 2025. 1. 3.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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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는 언어가 아니기 때문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넘어서는 지점이 있다. 그런 이미지가 갖는 고유한 속성 때문에 오랫동안 회화라는 장르가 유지되었고 역사 속에 기록될 수 있었다. 속성 자체가 다른 언어와 이미지가 서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의도와는 다르게 해석되는 경험을 하곤 하는데, 마르셀 뒤샹을 필두로 개념미술이 등장하면서 작품 속 작가가 의도한 확고한 주제와 메시지를 알아차리는 것이 미술 감상의 방식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런 개념미술이 한창 유행하고 있던 1960~70년대, 피터 도이그는 100호가 넘는 대형  캔버스에 유화로 풍경화를 그렸는데, 풍경 속에는 캐나다의 눈 덮인 풍경, 트리니다드의 열대 풍광, 런던의 어느 거리, 도시의 변경 등 자신이 경험한 공간이 담겨 있다. 피터 도이그의 풍경은 세부적으로 꼼꼼히 보기도 전에 전체적으로 풍기는 아우라가 보는 사람을 그 공간으로 끌어당긴다. 완벽한 묘사력으로 기술된 그림도 아니고 정확한 공간을 상기시키는 것도 아니다.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이미지 그 자체만으로도 많은 감정을 호소하는 것은 나를 사로잡았고 그의 그림에 관심을 두는 계기가 되었다. ‘이미지에 있어서 꼭 메시지가 있어야 할까?’에 의문을 가졌던 것에 그러지 않아도 미술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고 ‘아직도 회화가 유효할까?’에 대한 질문에 당연하다고 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다양한 장르와 시도가 포용되는 동시대 미술 안에서 회화를 고집하면서 아주 독특하고 확고한 위치에 자리매김한 피터 도이그가 동시대 미술에서 갖는 좌표는 무엇일까? 

 

 

BLOTTER: 물감을 캔버스에 담그다

 피터 도이그의 그림을 바라보면, 어느 순간 ‘작품을 보는 관람객’에서 ‘그림 속 인물’로 변하는 경험을 한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풍경이지만, 낯설지 않으며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함이 눈에 아른거린다. 어렴풋이 어렸을 적 기억을 떠올리며 그림 속 풍경과 병치시킨다. 화가가 경험한 세계, 시각적으로 기술된 한편의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림의 주체가 되어 그림 속 풍경을 경험한다. 세상에 홀로 남아있는 듯한, 고요하고 몽환적인 풍경 속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 내면과 마주하는 묘한 느낌을 불러낸다. 

 새하얀 눈밭이 반사된 빙판 위에는 파란 외투를 입고 오렌지색 머리띠를 한 소년이 서 있다. 이 소년은 화가 도이그의 형으로 형제가 자고 나란 캐나다의 얼어붙은 연못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년은 고개를 떨군 채 맨질한 빙판을 발로 문지르고 있는 중인 것 같은데 이는 어렸을 적 필자가 자주 하던 행동으로 주관적인 경험에 빗대어 소년의 행동을 추측, 해석해보았다. 

 전체적으로 보라색과 핑크빛 톤에 노랑, 주황, 하늘빛 등의 형형 색깔들로 곳곳에 포인트를 주었고 기름에 의해 용해된 유화물감의 흐름이 소년의 발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이러한 표면처리-다채로운 색 사용과 흘러내림 기법-는 화면 중앙에서 소용돌이치며 전체로 퍼져나가, 소년의 조그마한 몸짓이 그림 전체에 울림을 주고 있다. 

 이 그림이 얼어붙은 연못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흡수지, 압지를 뜻하는 제목 "Blotter"을 붙인 화가 의도를 통해서도 도이그가 그림 그리는 방식의 상당한 관심은 표면처리-화면 안에서의 색의 변화와 물감을 이용한 흘림, 번짐, 흩뿌림 그리고 두텁게 쌓은 마티에르-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Blotter"은 중앙에 위치한 소년이 연못에 흡수되는 듯한 서사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Blotter;흡수가 의미하는 것은 어떤 장소나 풍경으로 흡수되고 있다는 개념, 물감을 캔버스에 담그는 것을 말한다. 이런 표면 처리를 작업의 주요 소재로 활용하게 된 배경에는 날씨와 기후에 대한 그의 예민한 감각에 따른 것으로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트리니다드, 캐나다, 런던 등으로 이주하며 눈 덮인 산, 숲, 카누, 호수 등을 주로 보고 자라온 화가의 어린 시절과도 연관이 깊다. 영국에 있을 때는 캐나다의 눈 덮인 설경을, 트리니다드 섬에 있을 때는 영국을 그리워하며 특정 기후와 장소 에서 생겨나는 내면의 정서를 작업의 출발점으로 여겼고 과거와 현재의 기억의 거리, 기억의 정도, 기억이 지닌 시간성을 나타내는 것이 그의 작업 소재가 되었다. 즉 특정 기후와 장소에 대한 그리움은 날씨-기후에 대한 그만의 예민한 감각을 통해 이질적이고 환각적인 색채로 변형되어 전혀 얘기치 못한 서사적인 구도로 재창조되었고 이는 피터 도이그의 독자적인 회화 세계를 구축하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

 뒤샹 이후 ‘미술이 무엇이냐?’에 대한 질문들이 이어지는 현대 미술에는 다양성이 공존하지만, 모두가 회화가 한물갔다고 여겼을 때, 피터 도이그는 회화를 끝까지 고집하면서도 동시대 미술에서 확고한 자리를 잡았다. 과거 전통적인 회화가 상징적 주제를 가지고 거대한 이야기를 해왔다면, 동시대 미술에서는 일상의 소재, 사회 문제, 우리 주변의 관심사와 경험이 주제로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개념미술이 성행하던 시기를 지나 2000년대를 훌쩍 넘은 현재 동시대 미술에서 중요한 화두는 ‘무엇을 그리느냐’일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회화란, 작가만의 감각과 시각으로 고유한 이미지를 창조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새로운 시각을 발견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런 점에 있어 피터 도이그는 현대인들이 많이 접하는 잡지와 대중매체의 사진을 바탕으로 자신의 경험과 기억, 시간을 더해 독특하고  환상적인 그림을 구축하였고 피터 도이그가 동시대에서 인정받는 작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요인은 그림을 통해 심오한 주제를 얘기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다양한 장소에서 경험한 감각들을 사진 이미지와 결합해 개인의 정체성을 표출하는 방식이 우리에게도 익숙하면서 신선하게 다가오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한다.

 

 

『참고자료』 

  1. 이주영,  『순수 기억 이미지와 숲의 조형성 연구』,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조형예술학과 한국화 제공, 2016.6
  2. 심은록, 『세계에서 가장 비싼작가 10』, 아트북스, 2013
  3. Tomkins, Calvin, 『Somewhere Different, New Yorker』, 2017. 12. 11
  4. Peter Doig and Chris Ofili, 『BOMB』, New Art Publications, 2007, No. 101
  5. https://en.wikipedia.org/wiki/Peter_Doig
  6. https://uk.phaidon.com/agenda/art/articles/2015/may/06/from-book-to-bid-peter-doig-s-swamp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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