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심 한복판 한국 전통의 자취가 남아있는 북촌 골목을 따라 갤러리에 들어 서자, 높은 층고의 복층 화이트 갤러리에 녹색 그림들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도심 속 아지트. 마치 숲속에 온 것 같았다. 내게 산뜻함을 선사한 사진 같기도 하고 그림 같기도 한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오돌토돌한 캔버스에 올려진 초록색 물감. 발랐던 물감이 주르륵 흘러내린 자국이 보인다. 붓 터치 하나하나가 산이 되고 나뭇잎이 되어 생명으로 탈바꿈하였으나 분명히 신문지 같은 회색 사진 위 강홍구만의 시선과 색감으로 덧입혀진 것이었다. 생경하기도 한 이 낯선 방식을 하나의 이미지에 잘 우려낸 것은 강홍구 그림 스타일의 지표이다.
마치 광각 렌즈로 찍은 듯한 넓은 시야의 이미지 속 장소는 공터를 덮고 있는 녹색들로 가득하다. 전체적으로 보면 하나의 녹색 숲으로 뒤덮인 시골의 자연 풍경 같지만, 작품 속 공간은 용산역의 개발 취소 구역, 평택으로 이사 간 용산의 미국 주둔지, 은평 뉴타운, 창신동 채석장 흔적... 이제는 모두 사라져버린 서울의 집들과 공간이다. 서울 도심 재개발이 이루어지는 1976년경 목포에서 상경한 강홍구는 미처 개발되지 못한 버려진 공터에 주목했다. 그에게 공터란 "곧 사라질 운명에 처한 일시적인 유토피아이며 아직 녹색으로 남아 있는 장소들은 커다란 상처를 임시로 덮고 있거나 운 좋게 상처 입지 않은 장소"이다.
급격한 현대화를 겪으며 지금은 흔적도 없어진 은평 뉴타운 기자촌에 있던 조팝나무, 현재 문화복합시설이 들어서 있는 한강의 노들 섬, 개천이 있던 안국, 2020년 현재 서울에서 절대 마주할 수 없는 풍경에 중년의 관람객들은 강홍구가 바라봤던 서울의 맥락과 상황에서 공감 어린 눈빛을 보내고, 젊은 청년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상상하기도 한다. 이런 관람객의 감상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걸 의도라도 한 것일까? 벽면에 작품 관련 설명글이 쓰인 일반적인 전시장과 달리 그림이 놓인 바닥에 작가의 큼지막한 붓글씨로 몇 년도 상황인지 간략하게 제시한다. 휘황찬란하고 아름다운 것들에만 주목하기 바빴던 현대인들에게 휴식을 제공하는 풍경인 줄 알았는데 실상 그 이면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서울의 모습이 담겨 있다. 작가는 상황에 따라 유토피아일 수도 아픔을 간직한 공간일 수도 있는 양면성을 가진 공간을 녹색 물감으로 우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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