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 재단은 2010년부터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통해 매년 4명의 작가를 지원해 왔다.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작가는 프랑스 전역에 위치한 17개의 에르메스 가죽공방 중 한 곳으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가죽, 실크, 은, 크리스탈과 같은 진귀한 소재를 전폭적으로 지원받고 숙련된 기술과 무형의 기법들을 경험하게 된다. 새로운 환경과 공방의 장인 정신에 감명받은 작가들은 충분한 영감이 흐를 수 있도록 어떠한 선입견이란 구체적인 요청의 제약 없이 레지던시를 시작하게 된다.
아뜰리에 에르메스 재단 10주년을 맞이해 기획된 전시 ⟪전이의 형태⟫는 서울, 도쿄, 팡탱에서 개최되었다.
서울에서 진행된 ⟪전이의 형태⟫는 가죽 공방에 집중하였는데, 가죽은 에르메스의 가장 대표적 소재이기도 하지만, 가죽은 하나의 생명에서 온 것으로, 수없이 많은 과정을 거쳐 아주 얇은 스킨, 표피를 만들어 낸 후 박음질을 통해 상품(쓸모 있는) 또는 현대미술(쓸모가 전혀 없는)과 같은 차원이 다른 입체로 만들어낸다.
그리고 전시 제목 ⟪전이의 형태⟫에서 '전이'는 겉모습뿐만 아니라 성질 자체가 완전히 바뀌어버린다는 데 의미를 두고 있고
이 '전이'를 복합적 성격인 가죽으로 풀어내고 있다. 가죽이라는 재료를 크리티컬하게 바라보는 관점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1980년생, 대만 태생의 작가는 중국적 스케일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조각을 전공하였고 주로 흙, 양모, 린넨, 나무, 석탄과 같은 자연 재료(서구 재료와는 다른)를 사용한다. 그녀는 오뜨 가죽 공방 (Manufacture de Haute-Maroquinerie)에서 레지던시를 진행하였는데 그곳에서 동물성을 느낄 수 있는 질감의 다양한 측면을 느꼈다고 한다. 특히 "평평한 형태"에서 "곧게 선" 가죽 제품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영감을 받아 어떠한 틀과 거치대 없이도 조각이 수직을 유지할 수 있도록 장인들의 다양한 기법을 탐구하고 작품에 적용했다. 버킨백을 만들 때, 가죽과 가죽 사이에 힘을 줄 수 있도록 또 다른 가죽을 끼워 넣는 외치 기법을 작품에 적용하였고, 겉은 굉장히 견고한 재료이지만, 안쪽에는 양가죽 같은 부드러운 가죽으로 힘의 밸런스를 맞추어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형태를 갖기 위해서는 지지체가 있어야 하는데, 가죽 자체가 가지고 있는 밀도 차이(두껍고 얇고)만을 사용하여 작품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1987년생 이오 뷔르가르는 보르도 인근 탈랑스에서 태어나 파리를 기반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그녀는 그림에서부터 조각, 프레스코에서 저부조까지 다양한 매체와 방식을 기반으로 현실과 환상 세계를 자연스레 넘나 든다. 뷔르가르는 셀롱쿠르 가죽 공방 (Maroquinerie de Seloncourt)에서 레지던시를 진행했으며 장인들의 도움을 받아 언어와 그림, 부피감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무슨 일이 생기든>은 흩어진 설치 작품으로, 전시장에 이 작품을 설치할 때도 명확하게 어떤 위치에 이 작품을 설치하라는 지시가 없었다고 한다. 형태는 보는 이가 나름 유추하기 나름인데, 재밌는 것은 왼쪽 하단에 위치한 가죽으로 된 뚜껑과, 오른쪽에 서 있는 유리 섬유로 만들어진 기다란 오브제가 하나의 박스 같은 형태이고 중간에 설치된 나머지 오브제들이 이 박스에 다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장난감 토이 박스에 온갖 종류의 장비들이 내장되듯이 그녀의 상상력으로 트렁크에 담긴 일련의 오브제들은 제목 그대로 '무슨 일이 생기든'을 의미한다.
1983년생 파리 태생의 베랑제르 에냉은 에스티엔 고등그래픽예술산업학교 판화 과정 및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동시에 언어학을 수학했다. 미술과 언어학을 공부한 작가의 작품에서 유머코드와 풍자는 작품의 중요한 모티프가 된다. 2020년 알랑 가죽 공방 (Maroquinerie de I'Allan)에서 레지던시를 진행했고 가죽 조각에 마르케트리 (상감세공: 바탕으로 짠 직물에 달느 색의 무늬를 끼워 넣어 짜 맞추는 방식) 기법을 적용하여 파티가 끝난 후의 장면을 묘사하는 설치물을 만들었다.
<끝나버린 축제>에서 터진 폭죽의 흔적이 파티가 끝난 후의 상황을 현실감 있게 나타내고 있다. 미러볼, 폭죽 터트리고 파티가 끝난 후 찾아오는 씁쓸, 우울, 허무함은 기쁨 속에 내재되어 있는 감정으로 다양한 요소들을 통해 현대인의 허무 (vanitas)를 형형색의 가죽으로 표현했다.
미러 볼은 단일한 재료를 사용했지만, 최대한 많은 컬러를 사용하였고 네모난 가죽 속의 무늬는 가죽 위에 가죽을 덧붙인 것이 아니라 상감 기법(공예적 방법)을 사용하여 제작하였다.
"빅 마우스 빌리 배스" 오브제에 가죽을 입힌 작품으로, 양가죽과 타조 가죽(입술 부분)을 사용하였고 머리카락까지 붙어있어 유쾌한 측면이 부각된다. 그런데 접시 위에 올려져 파닥파닥 거리는 작가 자신을 물고기에 비유하여 표현한 자화상이기도 하다. 불편해도 시선의 대상이 되는 예술가를 표현한 것이다.
1982년생 파리를 기반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루시 피캉데는 신학과 철학을 수학했고 파리 제8대학에서 영화 미학에 관한 논문 과정을 맞췄다. 그녀의 작업세계에서 글쓰기는 필수적인 행위인데 실제로 많은 소설과 시를 쓰기도 하며, 이를 기반으로 초현실적이고 시적인 분위기의 자수, 수채화, 유화, 작은 오브제 등을 제작한다. 팡탱 가죽 공방 레지던시에서 6개월 동안 멘토링을 받으며 제작한 작업은 천체를 연상시키는 원형의 평면 위에 고대 이집트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은 '아쁠라' (붓터치 없이 납작하게 페인팅) 기법을 연상시키는 화려한 색감이 특징이다.
악어와 한 여인이 서로 머리와 머리를 물고 있는 형태는 싸움을 표현한 것이 아닌, 동물과 인간의 연결 그리고 공생의 장면을 재밌게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한 원형의 형태는 완전성, 우주, 지도와 같은 것을 내포하고 있어 긴장상태에서도 평형을 이루는 상태, 극과 극이 구분이 없는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1975년 그리스 태생의 바실리 살피스티는 파리를 기반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2000년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를 졸업한 그는 주로 회화 작업을 하며 이를 기반으로 다양한 형태와 기법을 활용한 작품을 선보인다.
노르망디 가죽 공방 (Maroquinerrie de Normandie)에서 레지던시를 진행한 그는 본격적인 작품을 구상하기 전, 가죽 재료의 심미성에서 나타나는 회화적 요소들을 탐구하면서 베레니케 (Bérénice)의 일화를 떠올리게 되었다. 사자자리 성단의 꼬리(동물의 형상)이 베레니케의 머리카락(인간의 일부)으로 변화하는 상징적 전환을 담고 있는 베레니케의 이야기를 오마주 하였다.
가죽의 무늬처럼 보이지만, 베레니케의 머리카락이 느껴지게 끔 섬세한 붓질로 완성된 결과물이다. 그리고 작품의 크기를 보면 세로 151cm, 가로 141cm로 표기되어 있다. 작품 상단에 고리에 고정되어 안쪽으로 말려있는 가죽을 풀면 가로 141cm가 되는 평면 작품으로 변신하기 때문에 이 작품은 평면 회화이면서 조각 작품이다. 살피스티는 이 작품을 고안할 때 인간의 신체 사이즈(Human Size Scale)를 생각해 제작하였다고 하며, 평면으로까지 전체를 확장하고 재료 자체가 스스로 형태를 만드는 것은 로버트 모리스의 작품 맥락과도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1979년생 아나스타지아 두카는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와 아테네 미술 학교를 졸업했다. 듀카는 잉글랜드 노샘프턴(Norhampton)에 위치한 존 롭(John Lobb) 슈즈 공장에서 레지던시를 경험하면서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 개개인의 취향과 선호도를 반영한 특별한 슈즈를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 영국의 존 롭 수제화 회사는 에르메스에 인수되었다.
총 105켤레를 제작하였고 전시된 작품은 총 21켤레로, 구두 1켤레 만드는데 1주일이 걸린다고 한다. 긴 프로세스를 거치는 장인은 정해진 제작 공정에 따라 특정하면서도 반복되는 작업을 지속하는데, 만들어진 건 거의 어두운 색, 그리고 일률적인 디자인으로 개성과 독특함을 결여했고 장인들이 항상 남을 위한 구두 만드는 것이 안타깝다고 생각하여 장인뿐만 아니라 공장에서 근무하는 직원 모두의 발 사이즈, 좋아하는 색, 선호하는 디자인을 파악하여 그들에게 꼭 맞는 105켤레의 슈즈 컬렉션을 완성하고 그들을 인터뷰하였다.
1978년생 세바스티앙 구쥐는 파리를 기반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으며 그림과 조각을 매개로 시각적 환경을 만들면서 순응주의나 명백한 의미의 틀로부터 탈피하고자 한다. 그는 생-쥐니앙 장갑 및 가죽 공방 (Ganterie-Maroquinerie de Saint-Junien)의 레지던시에서 가죽 작업을 처음으로 접했고 본래 작품에 사용하는 재료의 본질적 의미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던 그는 공방에서 장갑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양가죽에 흥미를 가지게 된다. 장갑은 주로 얇은 양가죽을 사용하여 제작하는데 그는 "흐늘흐늘한 검은색 가죽에 매료되었다"라고 표현했다. 가죽 장인의 숙련된 기술을 바탕으로 검은색 양가죽, 철과 나무로 만든 그의 작품 <역광>은 엽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석양을 배경으로 한 검은 실루엣의 야자수를 구현한 작품으로 평면과 입체를 오가는 중간 과정에 있다.
야자수의 끝은 가죽으로 잘라져 있는데 재료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활용하였고, 레지던시에 참여한 7명의 작가들 중 장인의 도움을 가장 안 받은 작품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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